장기전세주택 공고를 읽다가 입찰표를 접은 이유

얼마 전 경매 물건을 보던 지인이 장기전세주택 공고문을 들고 왔다. 낙찰받을 아파트의 예상 수익을 계산해 달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보증금과 거주 기간을 같이 따져보니, 당장 집을 사는 것보다 이쪽이 자기 형편에 맞겠다고 했다. 입찰장에 오래 다닌 나도 그 판단이 이해됐다. 집을 꼭 소유해야만 주거비를 줄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장기전세주택은 공공이 전세 방식으로 공급하는 임대주택이다. 서울주거포털 안내에는 주변 전세 시세의 80% 이하 수준으로 공급하고, 기본 계약은 2년이며 자격을 유지하면 재계약을 통해 최장 20년까지 거주할 수 있다고 나온다. 매달 내는 임대료가 없다는 점은 매력적이다. 다만 ‘시세의 80%’라는 문구만 보고 싸다고 판단하면, 경매에서 감정가만 보고 입찰하는 것과 비슷한 실수를 한다.
보증금이 싸 보여도 한 달 비용은 따로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비슷한 면적의 민간 전세가 5억 원이고, 장기전세주택 보증금이 4억 원이라고 치자. 차이는 1억 원이다. 이 돈을 아낀다고 해서 1억 원을 번 것은 아니다. 거주하는 동안 덜 묶어 두는 돈이다. 게다가 4억 원을 전부 현금으로 마련할 수 없다면 대출 이자도 나온다.
자기 돈 3억 원에 대출 1억 원을 보태고 금리를 연 4.5%로 가정하면, 이자만 연 450만 원, 월 37만 5천 원이다. 여기에 관리비와 이사비를 더해야 실제 부담이 보인다. 금리는 사람마다 다르고 대출 가능 여부도 상품과 개인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월세가 0원’이라는 말이 ‘매달 나가는 돈이 0원’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경매 물건을 볼 때도 낙찰가만 적지 않는다. 취득세, 수리비, 명도비, 대출 이자, 보유 중 관리비까지 한 줄씩 쓴다. 장기전세주택 역시 보증금 숫자 하나로 비교하지 않는다. 같은 단지 또는 가까운 단지의 실제 전세 거래와 면적, 층, 준공연도, 출퇴근 시간을 나란히 놓는다. 보증금 차이가 커도 매일 왕복 두 시간이 더 걸린다면 그 집이 누구에게나 싼 선택은 아니다.
‘최장 20년’은 내 계약서에 찍힌 보장 기간이 아니다
공고문에서 내가 먼저 표시하는 문장은 공급 호수보다 계약 갱신 조건이다. 2년마다 자격을 다시 확인할 수 있고, 소득·자산·무주택 요건과 보증금 변동을 살펴야 한다. 처음 통과했다고 20년 동안 아무 조건 없이 사는 구조로 받아들이면 위험하다. 분양전환되는 집도 아니어서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소유권이 생기지 않는다.
기존 단지는 더 조심스럽다.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의 2026년 제51차 공고는 서울리츠 3호 장기전세주택에 대해 해당 주택의 임대개시일부터 20년의 법정 임대의무기간이 끝나면 갱신이 거절될 수 있다고 안내한다. 공고가 든 예시에서는 최초 입주연도가 2011년인 단지는 2031년 무렵 갱신이 거절될 수 있다. 지금 입주한다고 내 앞에 새 20년이 통째로 놓이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관심 단지가 기존 주택이라면 최초 입주연도와 임대개시일을 공고에서 꼭 확인한다.
보증금도 처음 금액으로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갱신 때 인상될 수 있으니 현재 보증금만 겨우 맞춰 계약하는 건 불안하다. 2년 뒤 추가로 마련할 수 있는 현금이 얼마나 되는지까지 계산해 두는 편이 낫다. 경매 잔금을 맞출 때 여유 자금 없이 대출 한도 끝까지 쓰면 작은 변수에도 흔들린다. 거주 계획도 마찬가지다.
청약 자격은 가족 한 사람 때문에 달라진다
서울주거포털은 신청 기준을 모집공고일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성년 무주택 세대구성원으로 안내한다. 여기에 공급 면적과 유형에 따른 소득, 자산, 자동차 기준이 붙는다. 같은 장기전세주택이라도 건설형인지 매입형인지, 전용면적이 얼마인지에 따라 순위와 청약통장 요건이 달라진다. 신혼부부를 위한 장기전세주택Ⅱ인 미리내집은 별도의 대상과 소득 기준을 둔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한 공고에서 본 자격을 다른 공고에 그대로 대입하면 안 된다.
특히 ‘나는 집이 없다’와 ‘우리 세대가 무주택이다’는 다르다. 배우자나 세대구성원의 주택 보유 여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소득은 월급 명세서 한 장만 보고 어림잡지 말고, 공고가 요구하는 산정 방식으로 맞춰야 한다. 경매 권리분석에서 말소기준권리 한 줄을 놓치면 계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청약에서도 기준일과 세대 범위를 잘못 읽으면 준비한 시간이 허사가 된다.
2026년 제51차 서울 장기전세주택 공고의 공급 호수는 예비입주자 모집을 포함해 1,381세대였다. 여기서 ‘예비입주자 포함’을 빼고 당장 들어갈 수 있는 집이 1,381세대라고 읽으면 기대가 틀어진다. 예비 순번을 받더라도 실제 입주까지 걸리는 시간은 별개다. 현재 살던 집의 계약 종료일을 맞춰야 한다면 당첨 가능성뿐 아니라 기다릴 수 있는 기간도 따져야 한다.
나는 공고문에서 이 순서로 숫자를 적는다
- 공급 유형과 면적을 확인하고, 내 세대에 적용되는 신청 자격과 순위를 표시한다.
- 보증금과 주변의 비슷한 집 전세 거래를 비교한다. 대출을 쓴다면 이자와 관리비도 월 비용으로 적는다.
- 최초 입주연도, 임대개시일, 2년 뒤 갱신 조건을 확인하고 추가 보증금에 대비할 돈을 남긴다.
- 실제 모집 호수와 예비입주자 수를 구분한 뒤, 지금 사는 집의 퇴거 시점과 맞춰 본다.
- 서류 발급 기준일과 제출 기간을 확인한다. 공고마다 요구 서류가 다르므로 신청 전에 해당 공고를 다시 읽는다.
경매를 하다 보면 내 집을 가져야 돈을 버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무리한 낙찰로 대출 이자와 수리비를 떠안느니, 조건에 맞는 장기전세주택에서 주거비를 통제하며 다음 선택을 기다리는 편이 나은 사람도 있다. 좋은 물건을 고를 때처럼, 오래 살 집도 이름이나 홍보 문구보다 내 현금흐름과 공고문의 작은 글씨에서 답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