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매물 몇 번 같이 봐줬더니, 싼 집보다 무서운 건 따로 있더라

얼마 전 지인이 전세매물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사진은 깔끔했고, 역까지 걸어서 7분이라 했고, 보증금은 주변보다 3천만 원쯤 낮았습니다. 보통 이런 매물을 보면 초보자는 먼저 설렙니다. 저는 반대로 등기부터 봅니다. 경매장에 오래 있다 보면 예쁜 싱크대보다 무서운 게 선순위 권리라는 걸 너무 자주 보게 됩니다.
싸게 나온 전세매물은 이유부터 물어야 합니다
전세매물이 싸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급하게 이사 날짜를 맞춰야 하는 집주인도 있고, 층이나 향 때문에 조금 낮게 나온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 시세보다 5퍼센트, 10퍼센트 낮은데도 며칠째 살아 있다면 그때는 가격보다 이유를 봐야 합니다.
제가 현장에서 많이 본 위험 신호는 이렇습니다. 신축 빌라인데 매매가와 전세가 차이가 거의 없는 물건, 집주인이 최근에 바뀐 물건, 같은 건물에 비슷한 전세매물이 한꺼번에 쏟아진 물건, 중개사가 등기부 이야기를 피하는 물건입니다. 이런 집은 겉으로는 멀쩡해도 보증금 회수 구조가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매매 시세가 2억 4천만 원인데 전세보증금이 2억 2천만 원이면 여유가 2천만 원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근저당, 체납 가능성, 매각 시 하락률까지 넣으면 안전마진은 거의 없습니다. 경매에서는 2억 4천짜리가 늘 2억 4천에 팔리지 않습니다. 유찰 한 번이면 계산이 확 달라집니다.
등기부 한 장에서 이미 절반은 보입니다
전세매물을 볼 때 등기부등본은 선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갑구에서는 소유자가 누구인지, 소유권이 최근에 자주 바뀌었는지, 압류나 가압류가 있는지 봅니다. 을구에서는 근저당권, 전세권, 임차권등기 같은 부담을 봅니다. 여기서 초보가 제일 많이 놓치는 부분이 날짜입니다.
권리는 금액도 중요하지만 순서가 더 중요합니다. 내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보다 앞선 근저당이 있으면, 그 은행이 먼저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대항요건과 확정일자가 있어야 우선변제권을 기대할 수 있지만, 앞에 누가 서 있는지에 따라 실제 회수액은 달라집니다.
저는 전세매물 검토할 때 이렇게 계산합니다. 예상 낙찰가를 보수적으로 잡고, 선순위 근저당 채권최고액을 빼고, 선순위 임차인 보증금을 빼고, 남는 금액이 내 보증금을 충분히 덮는지 봅니다. 이 계산이 불편하면 그 물건은 애초에 초보에게 맞지 않습니다. 좋은 전세는 설명이 쉬워야 합니다.
중개사 말보다 숫자를 먼저 맞춰야 합니다
중개사가 ‘보증보험 됩니다’라고 말해도 그 자리에서 끝내면 안 됩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 같은 보증기관은 보증금, 주택 유형, 선순위 채권, 임대차 기간, 전입과 확정일자 같은 조건을 봅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보증금 한도도 다르고, 상품별 세부 기준도 바뀔 수 있습니다. 말로 되는 집과 실제 심사에서 되는 집은 다릅니다.
계약 전에 최소한 이 정도는 확인해야 합니다.
- 등기부등본 갑구와 을구에 압류, 가압류, 근저당, 신탁등기가 있는지
- 매매 실거래가와 현재 전세보증금 차이가 충분한지
- 다가구라면 내 앞에 들어온 세입자 보증금 총액이 얼마인지
-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 가능 여부를 말이 아니라 실제 조건으로 확인했는지
- 계약 당일과 잔금 당일 등기부를 다시 떼어보는지
특히 다가구주택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파트처럼 한 호실 등기만 보고 끝나는 구조가 아닙니다. 건물 전체에 선순위 보증금이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경매장에서 본 다가구 물건 중에는 후순위 임차인이 배당표를 받아 들고 나서야 자기 순서를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이미 늦습니다.
사진 좋은 집보다 빠져나올 수 있는 집이 낫습니다
전세매물을 고를 때 많은 분들이 인테리어, 역세권, 채광을 먼저 봅니다. 물론 살아야 하니까 중요합니다. 그런데 전세는 내 돈을 집주인에게 맡기는 계약입니다. 2년 뒤 돌려받을 수 있는지가 가장 앞에 와야 합니다. 저는 전세를 볼 때 ‘살기 좋은 집’보다 ‘문제가 생겨도 빠져나올 수 있는 집’인지 먼저 봅니다.
신축 빌라 분양가가 부풀려진 지역, 단기간에 매매가와 전세가가 같이 올라간 동네, 임대인이 여러 채를 가진 구조, 법인 임대인인데 설명이 흐린 경우는 한 번 더 멈춰야 합니다. 집주인이 여러 채를 가진 게 전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보증금 반환 능력은 반드시 따로 봐야 합니다. 전세 사고는 대개 집이 낡아서 생기는 게 아니라 돈 흐름이 막혀서 생깁니다.
계약서 특약도 대충 쓰면 안 됩니다. 잔금일 다음 날까지 권리 변동이 없을 것, 선순위 담보권이 있다면 말소 조건과 말소 시점을 명확히 할 것, 보증보험 가입에 협조할 것, 임대인의 세금 체납 관련 확인에 협조할 것 정도는 상황에 맞게 넣어야 합니다. 특약은 싸움이 났을 때 꺼내는 칼이라기보다, 애초에 이상한 집주인을 걸러내는 체입니다.
제가 전세매물을 거르는 방식
제가 가족에게 전세매물을 봐준다면 순서는 단순합니다. 첫째, 주변 실거래가와 전세 시세를 비교합니다. 둘째, 등기부를 보고 선순위 권리를 계산합니다. 셋째, 보증보험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넷째, 다가구나 신탁, 법인 소유처럼 구조가 복잡하면 웬만하면 패스합니다. 수익을 노리는 경매 투자와 달리 전세는 잃지 않는 게 먼저입니다.
전세는 싸게 들어가는 게임이 아닙니다. 보증금을 안전하게 돌려받고, 그 사이 마음 편히 사는 계약입니다. 전세매물 하나 고르면서 등기부 몇 장 더 떼고, 중개사에게 불편한 질문 몇 번 더 하는 건 귀찮은 일이 맞습니다. 그래도 그 귀찮음이 2억, 3억짜리 방패가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경매장에서 그 방패 없이 들어왔다가 뒤늦게 우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