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권 설정 계약서 한 장을 믿고 입찰할 뻔했다

법원 입찰장에서 전세권 설정 계약서 사본을 들고 와서 “계약기간이 끝났으니 문제없겠죠?”라고 묻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먼저 등기사항증명서와 매각물건명세서를 다시 펼쳤습니다. 계약서에 적힌 종료일만으로 낙찰자가 전세권을 인수하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세권은 세입자에게도, 경매 입찰자에게도 금액이 큰 권리입니다. 종이 한 장의 내용과 실제 등기 상태를 따로 읽어야 합니다.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전세권이 생기는 건 아니다
전세권 설정 계약서는 소유자와 전세권자가 전세금, 대상 부동산, 사용 범위 등을 약속한 문서입니다. 하지만 전세권은 설정계약과 등기를 거쳐 성립합니다. 계약서에 도장이 찍혀 있어도 등기사항증명서에 전세권 설정등기가 없다면, 그 계약서만 보고 등기된 전세권의 우선순위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 차이는 돈이 오가는 날에 중요해집니다. 가령 계약서 작성일이 3월 2일이고 근저당권 등기일이 3월 5일, 전세권 등기일이 3월 10일이라고 합시다. 계약서가 먼저 작성됐다는 이유로 전세권이 근저당권보다 앞선다고 계산하면 입찰가부터 틀어집니다. 등기된 권리의 순위는 원칙적으로 등기 순서가 기준입니다. 계약일과 등기일을 한 칸에 적어 놓고 비교하지 않는 이유죠.
임대차계약서에 ‘전세권을 설정한다’는 문구만 넣고 끝내는 경우도 봅니다. 등기까지 진행할 생각이라면 별도의 전세권 설정 계약서나 등기원인을 증명할 문서를 준비하고, 소유자의 등기 협조 일정까지 맞춰야 합니다. 찾기쉬운 생활법령정보도 전세권 설정등기 신청 서류에 전세권 설정 계약서와 소유자 측 등기필정보 등을 안내합니다. 서류 준비가 늦어져 등기가 밀리는 동안 다른 권리가 먼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계약서에서는 금액보다 범위를 먼저 읽는다
제가 계약서를 받을 때 처음 대조하는 것은 주소입니다. 동·호수, 건물 표시가 등기사항증명서의 표제부와 맞는지 봅니다. 다가구 건물의 일부나 상가 한 칸처럼 부동산 일부에 전세권을 설정한다면 어느 부분인지 더 분명해야 합니다. 일부에 설정하는 등기에는 범위를 특정할 도면도 필요합니다. ‘2층 일부’처럼 적힌 문구를 보고 머릿속으로 면적을 짐작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다음은 전세금과 실제 지급 내역입니다. 계약서에 1억 2,000만 원, 등기에도 1억 2,000만 원이 적혔더라도 계좌 이체 내역과 잔금 지급일을 확인합니다. 경매에서는 등기된 금액만 보고 모든 사정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계약서의 특약, 지급 증빙, 점유 현황이 서로 어긋나면 이유를 확인하기 전까지 계산을 멈추는 편이 낫습니다.
존속기간도 읽되, 만료일 하나로 권리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민법상 전세권의 약정 존속기간은 10년을 넘길 수 없고, 건물 전세권을 1년 미만으로 정하면 1년으로 봅니다. 건물 전세권에는 법정갱신 규정도 있습니다. 경매 현장에서는 기간이 지났다는 말보다 등기 상태와 배당요구 여부가 더 직접적인 판단 자료가 됩니다.
- 부동산 표시와 전세권 범위가 등기 예정 내용에 맞는지
- 전세금, 계약금·잔금 지급일과 계좌 증빙이 일치하는지
- 존속기간과 사용 범위가 분명한지
- 소유자의 등기 협조 시점, 설정 비용 부담을 정했는지
- 전세금 반환과 전세권 말소를 어떤 순서로 진행할지
마지막 항목은 계약할 때 대충 넘어가기 쉽습니다. 반환도 받기 전에 말소 서류부터 넘기면 세입자는 담보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을 모두 돌려준 소유자는 말소 협조가 지연되면 곤란해집니다. 두 절차를 동시에 이행하도록 약속하고 실제 지급 방식까지 맞춰 두는 게 안전합니다.
경매에서는 배당요구 한 장이 인수 여부를 바꾼다
입찰자라면 전세권 설정 계약서를 읽은 뒤 반드시 등기사항증명서의 선후관계와 경매 기록을 함께 봐야 합니다. 민사집행법에 따라 선순위 전세권은 전세권자가 배당요구를 하지 않으면 매수인이 인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전세권자가 배당요구를 하면 매각으로 소멸합니다. 계약기간이 끝났다는 사정만으로 선순위 전세권이 당연히 지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대법원 판례도 있습니다.
숫자로 놓으면 실수가 더 잘 보입니다. 낙찰 예상가가 2억 1,000만 원인 물건에 선순위 전세권 1억 2,000만 원이 남고, 전세권자가 배당요구를 하지 않아 낙찰자가 이를 인수하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입찰표에는 2억 1,000만 원을 쓰지만, 인수할 전세금까지 고려한 부담은 3억 3,000만 원입니다. 여기에 취득세, 명도 비용, 수리비, 대출 이자도 더해집니다. 주변 매매가가 3억 4,000만 원이라면 겉으로 보이는 ‘1억 3,000만 원 차익’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습니다.
배당요구를 확인했더라도 거기서 계산을 끝내지 않습니다. 같은 사람이 전세권자이면서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대항력 있는 임차인일 수도 있습니다. 대법원은 이런 경우 전세권에 따른 배당 후에도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에 관해 임차인으로서 대항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매각물건명세서, 현황조사보고서, 임차인의 전입 및 점유 자료, 배당요구 내역을 함께 봅니다. 서류끼리 충돌하면 입찰 전 해당 경매 기록과 권리관계를 더 확인해야 합니다.
설정 비용까지 적어야 실제 부담이 보인다
세입자 입장에서도 ‘전세권 설정해 준다’는 말만 듣고 비용을 빼놓으면 계약 막바지에 다툼이 생깁니다. 전세권 설정등기의 등록면허세는 전세금의 0.2%, 지방교육세는 그 등록면허세의 20%입니다. 전세금 1억 2,000만 원이라면 각각 24만 원과 4만 8,000원, 합계 28만 8,000원입니다. 여기에 등기신청 수수료와 대리인을 쓴다면 그 보수도 따로 듭니다. 누가 부담할지 계약서에 적어 두는 이유입니다.
저는 전세권 설정 계약서를 볼 때 ‘서명된 약속’, ‘완료된 등기’, ‘경매에서의 처리’를 세 번 나눠 확인합니다. 현장에서는 이 셋을 한 번에 같은 권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비싼 실수가 납니다. 초보 입찰자라면 계약서 한 장으로 인수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물건에서 잠시 물러서는 판단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