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순위 전세권 한 줄에 입찰가를 다시 쓴 날

입찰장에 갈 짐을 챙기다가 등기사항증명서를 다시 펼친 적이 있습니다. 전날까지 괜찮아 보이던 아파트였는데, 근저당권보다 앞에 적힌 전세권 한 줄이 눈에 걸렸습니다. 낙찰가만 계산해 둔 종이에는 전세금이 빠져 있었죠. 그날은 입찰가를 고치는 대신, 입찰부터 접었습니다.
선순위 전세권이 있는 물건을 볼 때 제가 먼저 묻는 건 시세보다 ‘낙찰자가 이 권리를 떠안는가’입니다. 감정가에서 많이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들어가면, 싸게 산 줄 알았던 가격에 전세금이 얹힐 수 있습니다.
등기 순서보다 먼저 확인할 한 가지
여기서 말하는 선순위 전세권은 경매에서 저당권·압류·가압류에 대항할 수 있는 전세권입니다. 등기사항증명서의 전세권 설정일과 다른 권리의 등기일을 대조해 출발점을 잡습니다. 예컨대 전세권이 2020년, 근저당권이 2022년에 설정됐다면 전세권을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 다만 날짜만 보고 판단을 끝내면 안 됩니다. 등기된 목적물이 집 전체인지 일부인지, 전세금은 얼마인지, 그 뒤 권리관계가 어떻게 이어졌는지까지 봐야 합니다.
법원 경매에서 이런 전세권은 전세권자가 배당요구를 하지 않으면 매수인이 인수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반대로 전세권자가 적법하게 배당요구를 하면 매각으로 전세권이 소멸합니다. 민사집행법 제91조의 기준이고, 대법원 판례도 같은 취지입니다. 현장에서 중요한 건 ‘배당요구를 했겠지’라는 짐작이 아니라 경매기록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배당요구 종기일도 함께 봅니다. 전세권자가 언제, 어떤 권리에 근거해 요구했는지 확인해야 가격을 정할 수 있습니다. 입찰 직전에 보는 경매 정보 화면의 짧은 문구만으로는 이 부분이 또렷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싸 보이는 낙찰가에 전세금이 붙는다
숫자로 놓으면 위험이 선명해집니다. 시세를 4억 원으로 조사한 주택에 1억 5천만 원의 선순위 전세권이 있고, 전세권자가 배당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죠. 2억 4천만 원에 낙찰받아도 계산을 거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전세권을 인수한다면 향후 전세금 반환 부담까지 고려한 금액은 3억 9천만 원입니다. 여기에 취득세, 등기 비용, 이자, 수리비가 더해집니다. 전세권의 범위와 반환 관계는 계약서와 점유 상태를 함께 확인해야 하지만, 입찰가만 시세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런 물건에서 ‘얼마에 낙찰될까’보다 ‘전세금을 포함해 얼마에 취득하는 셈인가’를 먼저 적습니다. 현장 시세를 4억 원으로 봤더라도 실제 매매 가능 가격이 3억 7천만 원이고 수리에 2천만 원이 든다면, 앞의 2억 4천만 원 입찰가는 전혀 싸지 않습니다. 경락잔금대출이 예상보다 적게 나오면 현금 부담도 커집니다.
전세권자가 배당요구를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계산 방식이 달라집니다. 전세권 자체는 매각으로 소멸하므로 앞의 예처럼 전세금 1억 5천만 원을 곧바로 낙찰가에 더해 ‘인수금’으로 잡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빈집을 바로 넘겨받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누가 살고 있는지, 그 사람이 전세권 외에 임차인으로서 어떤 권리를 갖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배당요구서의 이름보다 권리 근거가 중요하다
제가 초보 때 가장 헷갈렸던 대목이 여기입니다. 같은 사람이 전세권자이면서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임차인일 수 있습니다. 전입신고와 점유를 갖추고 확정일자도 받은 뒤, 보증금을 지키려고 전세권 등기까지 해 둔 경우죠. 이 두 지위는 따로 봐야 합니다.
대법원은 임차인 지위에 근거한 배당요구를 전세권에 관한 배당요구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서류에 그 사람 이름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전세권도 소멸하겠구나’라고 넘기면 위험합니다. 전세권에 대한 배당요구가 없었다면 선순위 전세권이 매수인에게 인수될 수 있습니다. 매각물건명세서의 인수 문구와 배당요구서의 권리 근거가 맞는지 경매기록에서 대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반대 방향의 함정도 있습니다. 전세권자로서 배당요구해 전세권이 소멸하더라도, 그 사람이 별도로 매수인에게 대항할 수 있는 주택 임차인이라면 배당받지 못한 보증금에 관한 문제가 남을 수 있습니다. 대법원은 두 지위를 함께 가진 임차인이 전세권 배당요구 후에도 변제받지 못한 보증금에 대해 대항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전세권 소멸’이라는 한 문장만으로 명도 비용이나 보증금 부담을 0원으로 적어서는 안 됩니다. 대항력의 성립 시점과 유지 여부, 실제 배당 예상액을 각각 확인해야 합니다.
입찰 전날 제가 다시 보는 서류
등기사항증명서로 전세권 설정일·전세금·설정 범위를 보고, 매각물건명세서에서 매수인이 인수할 권리와 점유 관계를 읽습니다. 현황조사서에는 누가 점유하는지 단서가 있고, 경매기록에는 배당요구 종기와 제출된 서류가 있습니다. 서로 내용이 어긋나면 편한 쪽을 골라 믿지 않습니다. 법원 기록을 더 확인하고,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남으면 가격에 위험을 반영하거나 입찰을 접습니다.
- 전세권이 다른 권리에 앞서 있는가, 설정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 전세권자가 종기까지 전세권에 근거해 배당요구했는가
- 점유자가 따로 있는가, 전입·점유·확정일자에 따른 임차인 지위는 어떤가
- 예상 배당액과 남을 수 있는 보증금, 명도 비용을 계산했는가
- 실거래 시세와 대출 가능액을 확인한 뒤에도 여유가 있는가
매각물건명세서에 인수 권리 기재가 없더라도 그것만으로 안심하지 않습니다. 대법원 판례에는 명세서의 잘못된 기재를 믿고 매수했다가 선순위 전세권을 인수한 사례가 있습니다. 입찰 전날 서류를 다시 보는 일이 번거롭지만, 낙찰 뒤 전세금 문제를 맞닥뜨리는 것보다는 훨씬 쌉니다. 선순위 전세권 물건에서 제가 지키는 기준은 단순합니다. 모르는 금액이 남아 있으면 아직 입찰가를 쓸 때가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