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 제가 현장에서 꼭 보는 것들

얼마 전 경매 법정에서 다가구주택 하나를 봤는데, 감정가보다 꽤 낮게 나왔는데도 입찰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등기부만 보면 깨끗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선순위 임차인 보증금이 꽤 쌓여 있었거든요. 전세계약도 비슷합니다. 겉으로 멀쩡한 집, 친절한 집주인, 깨끗한 인테리어만 보고 들어가면 나중에 보증금 받을 때 얼굴이 하얘지는 일이 생깁니다.
저는 경매를 오래 하면서 전세 세입자가 왜 돈을 못 돌려받는지 많이 봤습니다. 대부분은 대단히 복잡한 사기 수법 때문만은 아닙니다. 계약 전에 등기부 한 번 더 안 보고, 시세를 대충 믿고, 다가구 선순위 보증금을 확인하지 않은 작은 구멍에서 시작됩니다. 전세계약은 집을 빌리는 일이지만, 돈의 크기로 보면 작은 투자 하나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전세가는 싸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초보자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변보다 2천만 원 싸게 나왔어요.” 그런데 경매 현장에서 보면 싸게 나온 물건에는 대개 이유가 있습니다. 집주인이 급해서일 수도 있지만, 근저당이 많거나, 보증보험 가입이 어렵거나, 이미 같은 건물에 선순위 임차인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매 시세가 3억 원인 빌라에 전세 2억 7천만 원이 들어간다고 해보겠습니다. 겉으로는 전세가율 90%입니다. 여기에 근저당 3천만 원만 있어도 이미 위험합니다. 경매로 넘어가면 감정가 그대로 팔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3억짜리가 2억 4천만 원에 낙찰되는 경우도 있고, 유찰이 반복되면 더 내려갑니다. 그때 선순위 채권부터 빠지고 나면 세입자 보증금은 뒤로 밀립니다.
전세가를 볼 때는 주변 전세 시세보다 매매 시세를 먼저 봐야 합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이나 한국부동산원 자료로 최근 매매가를 확인하고, 인근 중개업소 두세 곳에 실제 거래 분위기를 물어보는 게 낫습니다. 호가만 보면 안 됩니다. 집주인이 받고 싶은 가격과 시장에서 실제 찍힌 가격은 전혀 다를 때가 많습니다.
등기부는 계약 당일에도 다시 봐야 합니다
등기부등본은 전세계약의 기본입니다. 갑구에서는 소유자가 누구인지, 압류나 가압류 같은 흔적이 있는지 봅니다. 을구에서는 근저당권, 전세권 같은 담보 권리를 확인합니다. 여기서 이름 하나 틀리거나, 계약 상대가 실제 소유자가 아니면 일단 멈춰야 합니다.
제가 권하는 방식은 세 번 확인입니다. 집 보러 간 날 한 번, 계약서 쓰는 날 한 번, 잔금 치르기 직전 한 번입니다. 잔금일 아침에 등기부를 다시 떼봤더니 전날 근저당이 새로 접수된 사례도 현장에서는 나옵니다. 이런 일은 드물지만, 한 번 걸리면 보증금 전체가 흔들립니다.
특약도 그냥 형식 문구로 넘기면 안 됩니다. “잔금일 다음 날까지 현재 등기부상 권리관계를 유지하고, 임대인은 신규 근저당권 설정 등 임차인의 대항력과 우선변제권 확보에 불리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식의 문구가 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특약이 만능 방패는 아닙니다. 그래도 나중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임대인의 의무를 분명히 남겨두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가구주택은 등기부만 믿으면 위험합니다
아파트나 오피스텔은 호실별로 등기가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다가구주택은 건물 전체가 한 명의 소유로 등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302호에 들어가도 등기부에는 302호 전세보증금이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초보자에게 특히 위험합니다.
다가구에서는 나보다 먼저 들어온 세입자들의 보증금이 중요합니다. 선순위 임차인이 5명이고, 그 보증금 합계가 4억 원인데, 건물 매매가가 6억 원이라면 어떨까요. 여기에 내 보증금 1억 5천만 원이 더 들어가면 총 임차보증금만 5억 5천만 원입니다. 경매에서 6억 원을 온전히 받지 못하면 뒤 순위는 바로 손실 구간에 들어갑니다.
계약 전에는 확정일자 부여 현황, 전입세대 열람, 선순위 보증금 내역을 확인해야 합니다. 임대인 동의가 필요한 자료도 있으니, 협조를 꺼리면 그 자체를 신호로 봐야 합니다. “다들 그냥 계약한다”는 말은 현장에서 제일 값비싼 말 중 하나입니다.
- 등기부상 근저당권 금액과 실제 채권최고액 확인
- 다가구의 선순위 임차인 수와 보증금 합계 확인
- 건축물대장상 위반건축물 여부 확인
- 전입세대 열람으로 실제 점유 관계 확인
- 임대인의 국세·지방세 체납 가능성 확인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는 늦추면 손해입니다
전세계약 후에는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바로 챙겨야 합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보증금을 지키는 기본 틀은 실제 점유, 전입신고, 확정일자입니다. 대항력은 보통 전입신고를 마친 다음 날부터 생기기 때문에 잔금일의 몇 시간이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오전에 잔금을 주고 오후에 전입신고를 했다고 해도, 집주인이 같은 날 은행 근저당을 먼저 접수하면 순위가 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잔금 전 등기부 확인, 잔금 직후 전입신고와 확정일자, 신규 담보 설정 금지 특약을 한 묶음으로 봐야 합니다.
임대차 신고도 놓치면 안 됩니다. 보증금 6천만 원 초과 또는 월세 30만 원 초과 등 일정 요건에 해당하면 신고 대상입니다. 신고 과정에서 확정일자가 함께 처리되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현장에서 항상 별도로 확인하라고 말합니다. 행정 처리는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누락되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게 아닙니다.
보증보험은 가입 가능 여부를 계약 전에 봐야 합니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은 나중에 가입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계약하고 보니 보증보험 가입이 안 되는 집도 있습니다. 전세가율이 높거나, 선순위 채권이 많거나, 위반건축물 문제가 있거나, 임대인 관련 요건에서 걸릴 수 있습니다.
계약서 쓰기 전에 주택도시보증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 서울보증보험의 보증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편이 낫습니다. 특히 신축 빌라 전세는 더 보수적으로 봐야 합니다. 분양가와 실거래가가 다르고, 주변 비교 사례가 적고, 임대인이 여러 채를 갭투자로 들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라면 초보자에게 이런 기준을 둡니다. 매매가 대비 전세가가 과하게 높고, 근저당이 남아 있고, 보증보험이 애매하고, 임대인이 자료 제출을 피한다면 그 집은 지나가는 게 낫습니다. 좋은 집은 또 나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보증금은 쉽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계약서보다 중요한 건 이상한 느낌을 무시하지 않는 겁니다
현장에서 오래 있다 보면 서류보다 먼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집주인이 등기부 확인을 귀찮아한다든지, 중개사가 “이 정도는 괜찮다”고만 반복한다든지, 시세 질문에 정확한 거래 사례를 못 댄다든지요. 그럴 때는 성급하게 도장 찍지 않는 게 돈 버는 행동입니다.
전세계약은 싸고 예쁜 집을 고르는 게임이 아닙니다. 내 보증금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얼마나 회수될 수 있는지 따지는 절차입니다. 경매 투자자는 물건을 볼 때 늘 마지막 장면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얼마에 팔릴까, 누가 먼저 돈을 가져갈까, 내 순번은 어디쯤일까. 세입자도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초보자가 위험한 전세계약을 완벽하게 분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등기부, 시세, 선순위 보증금, 전입신고, 확정일자, 보증보험 이 여섯 가지만 제대로 잡아도 큰 사고는 많이 줄어듭니다. 저는 수익보다 생존을 먼저 보는 사람이 오래 간다고 믿습니다. 전세도 똑같습니다. 빨리 계약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돈을 지키는 사람이 이긴다는 쪽에 저는 표를 던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