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 계약 특약 한 줄을 놓쳐 보증금이 묶일 뻔했다

경매 물건을 보러 다니다 보면 임차인이 쓴 계약서를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몇 년 전 한 원룸에서 눈에 걸린 건 월세 액수보다 특약란의 빈칸이었습니다. 입주 당일 집주인이 추가 대출을 받았고, 세입자는 그날 전입신고를 했다고 했습니다. 보증금이 실제로 얼마나 회수될지는 권리관계와 배당을 따져야 했지만, 그 빈칸 하나가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월세 계약 특약은 좋은 말을 적어두는 칸이 아닙니다. 돈이 오가는 날짜와 문제가 생겼을 때의 처리 방법을 정하는 칸입니다.
잔금 치르는 날, 등기부를 다시 보는 이유
계약서를 쓸 때 등기부가 깨끗했다고 잔금일까지 그대로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집을 인도받고 주민등록을 마친 임차인의 대항력은 그다음 날부터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계약 당일뿐 아니라 잔금을 보내기 직전에도 등기사항증명서를 다시 봅니다. 근저당권, 압류, 가압류가 새로 들어왔는지 확인하는 데 몇 분이면 됩니다.
특약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적는 편이 낫습니다. ‘임대인은 계약 체결일부터 임차인의 전입신고 다음 날까지 임차인의 보증금 회수에 불리한 새로운 담보권을 설정하지 않는다. 이를 위반한 경우 임차인은 계약을 해제 또는 해지하고 지급한 금액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문구를 넣었다고 등기부의 새 권리가 저절로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특약 확인과 잔금 직전 재확인은 함께 가야 합니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0만 원인 방과 보증금 5,000만 원에 월세 35만 원인 방은 매달 나가는 돈만 보면 뒤쪽이 싸 보입니다. 그런데 선순위 대출이 크다면 뒤쪽은 보증금 회수 위험을 더 많이 떠안습니다. 계약 전에는 등기부 외에도 기존 임차인의 보증금과 임대인의 납세 정보를 확인해야 합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은 계약할 때 임대인이 해당 주택의 임대차 정보와 납세증명서를 제시하거나, 관련 정보 열람에 동의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보여주기 어렵다는 말만 반복한다면 서명을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고장 수리비를 전부 세입자에게 넘기는 문구
월세 계약서에서 자주 보는 문장이 ‘시설물 고장은 임차인이 모두 수리한다’입니다. 보일러가 멈추거나 오래된 배관에서 물이 새도 세입자가 전부 부담한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죠. 민법은 임대인이 집을 사용·수익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할 의무를 정합니다. 실제 수리 책임은 고장 원인과 규모, 계약 당시 상태에 따라 달라지니 ‘전부’라는 말로 덮어둘 일이 아닙니다.
제가 선호하는 문구는 이렇습니다. ‘노후 및 통상 사용으로 인한 보일러·배관 등 주요 설비의 고장은 임대인이 수리한다. 임차인의 고의·과실로 인한 파손은 임차인이 부담한다. 고장 발견 시 임차인은 지체 없이 임대인에게 알린다.’ 에어컨, 세탁기처럼 옵션으로 제공되는 가전은 제품 이름과 현재 작동 상태까지 적어두면 좋습니다. 입주할 때 누수 자국, 장판 들뜸, 창틀 곰팡이를 사진으로 남겨 양쪽이 공유하면 나중에 생긴 손상과 원래 있던 하자를 구별하기 쉬워집니다.
여기서 수리비를 마음대로 월세에서 빼는 건 조심해야 합니다. 임대인에게 고장을 알리고, 수리 요청과 비용 협의 과정을 문자로 남기세요. 급한 누수라면 피해를 막는 조치가 먼저겠지만, 언제 무엇을 수리했고 얼마를 썼는지 영수증까지 챙겨야 비용을 두고 다툴 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관리비 10만 원의 속을 열어봐야 한다
방을 보여줄 때는 ‘월세 50만 원’이라고 말해놓고 계약서에 관리비 10만 원을 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매달 60만 원을 내는 건 같아도 관리비에 무엇이 포함되는지 모르면 입주 뒤 청구서를 보고 다툽니다. 공용 전기료인지, 인터넷 요금인지, 청소비인지, 수도료가 별도인지 계약 전에 확인해야 합니다.
특약에는 ‘관리비 월 10만 원에는 공용 전기료·건물 청소비·인터넷 사용료가 포함되며, 세대 전기·가스·수도 요금은 사용량에 따라 별도 부담한다’처럼 항목을 적을 수 있습니다. 실제 건물의 부과 방식과 맞는지도 확인해야 하고요. 주차비나 엘리베이터 사용료가 따로 있다면 그 금액도 써두는 편이 낫습니다. ‘관리비는 상황에 따라 조정’ 같은 문장은 조정 기준과 통지 시기가 빠져 있어 분쟁의 씨앗이 됩니다.
월세 계약에서는 매달 2만 원 차이도 2년이면 48만 원입니다. 작은 금액처럼 보여도 공실 기간이나 이사 비용까지 겹치면 계산이 달라집니다. 경매 입찰가를 정할 때 관리비 체납액을 확인하듯, 임차할 때도 매달 고정 지출의 항목을 끝까지 확인하는 게 맞습니다.
나갈 때 보증금에서 무엇을 뺄지
퇴거할 때 가장 시끄러운 건 ‘원상복구’라는 네 글자입니다. 입주 전부터 낡은 벽지를 새것으로 바꾸라는 뜻인지, 임차인이 못을 여러 개 박아 훼손한 부분을 고치라는 뜻인지 계약서만으로는 알기 어렵습니다. ‘임차인의 고의·과실로 생긴 파손은 임차인이 부담하되, 통상 사용에 따른 노후·마모는 제외한다. 공제할 비용은 항목과 근거를 제시해 협의한다’고 적어두면 대화의 출발점이 생깁니다.
보증금 반환 날짜도 ‘다음 세입자가 들어오면 준다’는 식으로 쓰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새 임차인을 구하는 건 임대인의 자금 계획입니다. ‘임대차 종료일에 임차인이 집을 인도하고, 임대인은 미납 차임과 확인된 정산금액을 공제한 보증금을 반환한다’처럼 양쪽이 해야 할 일을 같은 날짜에 적어두세요. 실제로 돈을 못 받은 채 먼저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전입 상태와 대항력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이사 전에 임차권등기명령 등 필요한 조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특약이 길다고 안전한 계약서는 아닙니다. 제가 입찰장에서 배운 건 한 줄의 권리관계가 수익 계산 전체를 뒤집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월세 계약도 비슷합니다. 잔금일의 등기, 고장 났을 때의 수리 책임, 매달 내는 관리비, 나갈 때의 보증금 반환일. 이 네 가지가 숫자와 날짜로 읽히는 계약서라면, 적어도 서로 다르게 기억할 여지는 많이 줄어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