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만기전 퇴거를 서둘렀다가 보증금이 묶였다

경매 물건을 보러 다니다 보면 이사 간 지 몇 달인데도 보증금을 못 받은 세입자를 만납니다. 처음엔 ‘집주인이 새 세입자 들어오면 준다더라’는 말만 믿었다고 해요. 전세 만기전 퇴거는 이삿짐을 빼는 날짜보다 계약이 언제 끝나는지, 보증금을 언제 받을 수 있는지부터 따져야 합니다.
계약서에 적힌 만기가 아직 남았다면
2년 계약을 맺고 8개월을 남긴 채 이직 때문에 나가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세입자가 이사 날짜를 통보했다고 해서 계약이 그날 끝나거나 보증금 반환일이 앞당겨지는 건 아닙니다. 계약서에 중도 해지 조항이 있는지 먼저 보고, 없다면 집주인과 종료일을 합의해야 합니다. 집주인이 새 세입자를 구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할 수도 있고요.
제가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새집 계약금이 아니라 기존 보증금 없이 버틸 수 있는 기간입니다. 보증금 3억 원이 묶인 상태에서 새집 잔금을 먼저 치러야 한다면, 단기 자금의 이자와 대출 가능 여부가 이사 계획 전체를 바꿉니다. 예를 들어 3억 원을 연 6%로 3개월 빌린다고 단순 계산하면 이자만 약 450만 원입니다. 실제 대출 조건과 수수료는 따로 확인해야 하지만, ‘곧 돌려받겠지’ 하고 넘길 액수는 아니죠.
중도 퇴거를 합의했다면 문자 한 통으로 끝내지 말고 계약 종료일, 보증금 반환일과 금액, 열쇠를 넘기는 시점, 미납 관리비, 새 임차인 모집 비용을 함께 적어 두는 편이 좋습니다. 중개보수도 ‘먼저 나가는 사람이 무조건 낸다’고 단정할 일이 아닙니다. 누가 얼마를 부담할지 집주인과 합의해 기록해야 나중에 보증금에서 갑자기 공제한다는 말을 줄일 수 있습니다.
갱신된 계약이라면 3개월을 다시 계산한다
같은 ‘만기 전 이사’라도 묵시적으로 갱신됐거나 세입자가 계약갱신요구권을 써서 갱신한 경우에는 계산이 달라집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이때 세입자는 해지를 통지할 수 있고, 집주인이 통지를 받은 날부터 3개월이 지나면 해지 효력이 생깁니다. 대법원은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한 뒤 갱신 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해지를 통지한 경우에도 3개월 규정을 적용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서 자주 놓치는 말이 ‘받은 날’입니다. 제가 1일에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만 챙기고 상대가 언제 받았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날짜를 두고 다툴 수 있습니다. 계약서에 적힌 집주인에게 해지 의사를 분명히 전하고, 답장이나 내용증명처럼 도달 시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남겨 두는 이유입니다. 새 임차인이 들어와야만 3개월이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처음 체결한 계약의 기간이 아직 남아 있는 경우까지 ‘통지 후 3개월이면 언제든 나간다’고 적용하면 곤란합니다. 묵시적 갱신인지,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했는지, 아니면 새 기간을 정해 별도로 합의했는지 계약서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특히 갱신 과정에서 쓴 서류가 있다면 제목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당시 어떤 의사로 작성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보증금보다 먼저 전입을 빼면 생기는 일
경매 현장에서 이사 날짜를 유심히 보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주택임대차의 대항력은 주택의 인도와 주민등록을 바탕으로 합니다. 보증금을 못 받은 채 먼저 집을 비우거나 전출하면 기존 권리를 유지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뒤늦게 임차권등기를 마쳐도 이미 잃은 대항력이 과거 시점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라는 대법원 판단도 있습니다.
계약이 끝났는데 보증금을 못 받았고 이사는 해야 한다면 임차권등기명령을 검토해야 합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대차 종료 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가 법원에 이를 신청할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순서는 신청이 아니라 등기가 실제로 마쳐졌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기존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지키려면 전출하거나 집을 넘기기 전에 등기 완료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직 계약 종료 전이라면 이 절차로 당장 보증금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집주인이 ‘열쇠부터 주면 바로 송금하겠다’고 할 때도 조심스럽습니다. 계약이 종료된 뒤 보증금 반환과 집 인도는 맞물려 처리할 문제이니, 반환 자금과 송금 시각을 확인하고 같은 날 맞춰 진행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새집 잔금일이 촉박하다면 더더욱 입금되지 않은 돈을 이미 받은 돈처럼 계산하면 안 됩니다.
새 세입자를 구하기 전에 볼 숫자들
전세 만기전 퇴거를 협의할 때 집주인은 대개 새 세입자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 집의 현재 전세 시세가 기존 보증금보다 낮다면 문제가 커집니다. 기존 보증금이 3억 원인데 새 전세 시세가 2억 6천만 원이라면 차액 4천만 원을 집주인이 마련해야 합니다. 새 계약이 잡혔다고 해도 그 차액의 자금 계획이 없으면 반환일이 밀릴 수 있습니다. 중개업소에 같은 단지의 최근 거래와 현재 매물 가격을 함께 물어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등기사항증명서도 다시 봅니다. 계약할 때 없던 근저당이나 압류가 생겼다면 새 세입자 구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고, 보증금 회수 위험도 달라집니다. 반환보증에 가입했다면 보증기관에 해지 통지와 사고 접수에 필요한 절차를 미리 확인해야 합니다. 전세대출이 있다면 은행에도 이사와 상환 일정을 알리고요. 보증금 전액이 통장에 들어와도 대출 상환액을 빼면 실제로 새집에 쓸 수 있는 돈은 다릅니다.
급하게 나가야 할 사정은 누구에게나 생깁니다. 저라면 이사 날짜를 확정하기 전에 계약이 끝나는 날과 돈이 들어오는 날을 각각 적어 놓겠습니다. 두 날짜 사이를 메울 방법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 간격이 이번 이사에서 가장 비싼 비용이 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