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중도해지 합의서 한 줄 빼먹고 식겁한 날

경매 물건을 보다가 임차인이 이사한 날짜와 보증금 반환 날짜가 다른 서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며칠 차이겠거니 했는데, 그 며칠 사이에 누가 집을 점유했고 보증금을 얼마나 돌려받았는지가 권리분석을 바꿨습니다. 전세 중도해지 합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계약을 끝내기로 했다’는 한 줄로는 정작 돈을 주고 집을 넘기는 순서를 알 수 없습니다.
먼저 계약이 어떻게 끝나는지부터 구분합니다
전세 계약기간이 남았는데 세입자 사정으로 나가려는 경우, 원칙적으로 집주인과 날짜와 조건을 맞춰야 합니다. 반면 묵시적으로 갱신됐거나 계약갱신요구권 행사로 갱신된 계약은 임차인이 해지를 통지할 수 있고, 집주인이 통지를 받은 날부터 3개월이 지나면 효력이 발생합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에 있는 규정입니다. 모든 중도 퇴거에 무조건 ‘3개월만 기다리면 된다’고 적용하면 곤란합니다.
가령 원래 계약이 내년 8월까지인데 올해 12월에 나가고 싶다면, 집주인이 언제 보증금을 돌려줄지 합의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새 세입자가 구해지면 돌려주겠다는 말만 듣고 이삿짐부터 빼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데 새 세입자를 구하는 시점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합의서에는 ‘새 임차인 입주 시’처럼 끝이 불분명한 표현보다 반환 날짜를 적는 편이 분쟁을 줄입니다.
합의서에는 해지일과 반환일을 따로 씁니다
전세 중도해지 합의서의 첫 줄에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이름, 임차주택의 정확한 주소와 호수, 원래 계약기간, 보증금을 적습니다. 다음으로 두 사람이 합의해 계약을 끝내는 날짜를 씁니다. 여기서 멈추면 부족합니다. 보증금 얼마를 어느 날, 어느 계좌로 돌려줄지, 임차인은 언제 집을 비우고 열쇠를 넘길지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증금 2억 원인 계약을 6월 30일에 끝내기로 했다면, ‘임대인은 6월 30일 임차인 명의 계좌로 보증금 2억 원을 반환하고, 임차인은 입금 확인과 동시에 주택과 열쇠를 인도한다’처럼 순서를 맞춰 씁니다. 이미 일부를 받았다면 지급한 금액과 날짜, 남은 금액을 각각 적어야 합니다. 대법원도 임차인의 주택 인도와 보증금 반환이 맞물리는 관계를 다뤄 왔습니다. 어느 한쪽이 먼저 전부 이행하는 것으로 읽히는 문구는 신중해야 합니다.
합의서 끝에는 작성일과 양쪽 서명 또는 날인을 남기고 각자 한 부씩 보관합니다. 집주인이 여러 명이면 계약상 임대인과 현재 소유자를 확인하고 서명 주체를 맞춰야 합니다. 대리인이 서명한다면 위임받은 범위도 확인해야 합니다. 경매 물건을 볼 때도 저는 계약서의 이름과 등기부의 소유자가 이어지는지 먼저 봅니다. 이름 하나가 다르면 나머지 문장도 쉽게 믿기 어렵습니다.
복비와 대출 문제를 말로 남겨두면 뒤에서 부딪힙니다
중도 퇴거를 얘기할 때 가장 흔한 말이 ‘새 세입자 복비는 세입자가 내세요’입니다. 누가 어떤 비용을 부담할지 서로 동의했다면 금액이나 산정 방식, 지급 시점을 적어두는 게 낫습니다. 중개보수 외에 이사비, 미납 관리비, 공과금, 원상복구비를 보증금에서 공제할지도 구분합니다. ‘모든 비용은 임차인 부담’처럼 넓게 쓰면 나중에 예상하지 못한 돈까지 다툴 수 있습니다.
전세자금대출이 있다면 반환 계좌도 확인해야 합니다. 보증금반환채권에 질권이 설정됐거나 채권이 양도된 계약은 집주인이 임차인 계좌로 전액 보내는 방식이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서류를 보면 은행의 대출 약정과 통지 내용을 먼저 확인합니다. 합의서에 계좌번호를 쓰기 전, 대출 취급 은행에 상환 금액과 송금 절차를 확인하는 게 안전합니다.
반환보증에 가입했다면 보증기관의 서류 기준도 따로 봐야 합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중도해지 합의서에 주택 주소, 원래 계약기간, 보증금, 합의해지일 등이 들어가야 한다고 안내합니다. 보증 이행을 청구할 때는 추가 증빙과 임차권등기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집주인과 세입자가 서명했다는 사실만으로 보증금이 바로 지급되는 건 아닙니다.
보증금을 못 받았다면 이사 날짜를 다시 봅니다
합의한 반환일이 왔는데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일단 이사하고 나중에 받자’는 선택은 위험합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대차가 끝나도 보증금을 돌려받을 때까지 임대차관계가 존속하는 것으로 봅니다. 다만 기존에 갖춘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지키려면 실제 점유와 전입 상태를 함부로 바꾸지 않아야 합니다.
이사가 꼭 필요하다면 임차권등기명령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법은 임대차 종료 후 보증금을 받지 못한 임차인이 법원에 이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합니다. 중요한 건 신청만 한 상태와 등기가 실제로 마쳐진 상태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대법원은 점유를 먼저 잃고 나중에 임차권등기가 된 경우, 앞서 잃은 대항력이 소급해 되살아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등기 완료를 확인하기 전에 짐을 빼거나 전입을 옮기는 일은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합의서 한 장이 돈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해지일, 반환액과 날짜, 집을 넘기는 순서가 분명하면 일이 틀어졌을 때 무엇을 약속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보면 큰 손실은 복잡한 법 조항보다 ‘그날 주기로 했잖아요’라는 서로 다른 기억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