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권설정 믿고 입찰했다가 보증금에 놀란 날

입찰장에서 등기사항증명서를 넘기다 보면 ‘전세권설정’이라는 글자에서 손이 멈출 때가 있다. 처음에는 전세금이 적혀 있으니 계산하기 쉬운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입찰가를 쓰려면 그 권리가 낙찰로 없어지는지, 낙찰자가 떠안는지부터 갈라야 한다. 이 한 줄을 잘못 읽으면 싸게 낙찰받았다는 기분이 며칠도 못 간다.
전세 계약과 전세권설정은 출발부터 다르다
흔히 전세 계약을 맺으면 전세권도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전세권은 소유자와 설정 계약을 하고 등기부에 전세권설정등기까지 마쳐야 하는 권리다. 등기부에는 전세금, 목적물, 존속기간 같은 내용이 표시된다. 임대인의 협력이 필요한 만큼 세입자가 혼자 전입신고하듯 처리할 수는 없다.
주택 임차인이 보증금을 지키는 길은 또 있다. 집을 인도받고 전입신고를 마치면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대항력이 그다음 날부터 생긴다. 여기에 계약서의 확정일자를 갖추면 경매에서 우선변제를 주장할 근거가 된다. 전세권설정등기와 전입신고·확정일자는 성립 요건도, 경매에서 따지는 순서도 서로 다르다. 전세권을 등기했다고 전입일과 점유 상태를 확인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세권자에게는 전세금을 후순위 권리자보다 우선 변제받을 권리가 있고, 설정자가 전세금 반환을 지체하면 목적물의 경매를 청구할 수도 있다. 민법 제303조와 제318조에 적힌 내용이다. 다만 ‘우선’이라는 말은 앞선 권리나 실제 매각대금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등기를 마친 날짜와 먼저 잡힌 담보권부터 봐야 한다.
선순위 전세권 하나로 입찰가가 뒤집힌다
계산을 쉽게 하려고 이런 물건을 가정해 보자. 예상 낙찰가가 2억 4천만 원인 아파트에 전세금 1억 5천만 원의 전세권이 먼저 등기됐고, 그 뒤에 은행 근저당권이 잡혔다. 전세권자가 경매절차에서 배당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선순위 전세권은 원칙적으로 낙찰자가 인수한다. 입찰가 2억 4천만 원만 자금계획에 적었다면 1억 5천만 원의 부담을 빠뜨린 셈이다. 취득세와 수리비를 넣기도 전부터 계산이 틀어진다.
같은 물건이라도 전세권자가 적법하게 배당요구를 했다면 경매 매각으로 그 전세권은 소멸한다. 민사집행법 제91조가 갈림길을 정한다. 반대로 근저당권 등에 대항할 수 없는 후순위 전세권은 원칙적으로 매각으로 소멸한다. 그래서 전세권이라는 이름만 보고 ‘무조건 인수’나 ‘무조건 소멸’이라고 적는 메모는 위험하다.
여기서 제가 입찰 전에 다시 보는 서류가 있다. 등기사항증명서의 접수 순위, 매각물건명세서, 현황조사서, 임대차 관련 신고 내용, 배당요구 여부다. 특히 배당요구는 전세권자의 의사와 제출 시점을 확인해야 한다. 채권자가 전세금반환채권을 압류했다는 사정만으로 전세권자 본인이 배당요구한 것과 같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대법원 판례에서도 이 구분이 문제 됐다.
매각물건명세서에 ‘인수되는 권리’가 표시돼 있다면 숫자를 다시 계산한다. 표시가 애매하거나 자료끼리 맞지 않으면 경매기록을 더 확인한다. 입찰 당일 등기부만 한 번 훑고 보증금 인수 여부를 추측하는 방식은 피한다. 권리분석의 실수는 낙찰 후 명도 협상에서도 그대로 돈 문제가 된다.
등기부의 전세권과 집에 사는 임차인은 따로 본다
전세권설정등기가 있는 사람과 실제 점유자가 같아 보여도 임차권까지 자동으로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주택 임차인으로서 언제 집을 인도받았는지, 언제 전입했는지, 확정일자는 언제인지 확인해야 한다. 전세권은 매각으로 소멸하더라도 별도로 대항력 있는 임차권이 남는 경우가 쟁점이 될 수 있다. 배당받은 금액과 남은 보증금까지 봐야 낙찰자의 부담을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세권설정일은 근저당권보다 늦어 후순위라 해도, 임차인이 그보다 앞서 입주와 전입신고를 마쳤다면 이야기의 출발점이 달라진다. 반대로 전세권 등기만 보고 오래된 임차인이라고 짐작했는데 실제 전입일은 늦을 수도 있다. 등기부의 날짜 한 줄과 주민등록 관련 날짜 한 줄을 섞어 읽으면 엉뚱한 입찰가가 나온다.
현장에서는 점유 관계도 확인한다. 현황조사서에 적힌 이름과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다르거나, 임대차계약서의 보증금과 등기부 전세금이 다르면 이유를 찾아야 한다. 관리비 체납, 이사 일정, 점유자의 협조 여부도 명도 비용에 영향을 준다. 서류상 권리가 소멸한다는 판단과 실제로 집을 비워 받는 일은 별개의 작업이다.
세입자라면 설정 비용보다 회수 가능성을 먼저 본다
전세권설정을 고민하는 세입자 입장에서도 등기만 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미 큰 근저당권이 잡혀 있고 집값에 비해 선순위 채무가 많다면, 뒤늦게 설정한 전세권으로 보증금 전액을 건지기 어렵다. 보증금 2억 원을 넣는 집의 예상 매각대금이 2억 3천만 원인데 선순위 채권이 1억 8천만 원이라면, 등기 비용보다 먼저 그 간격을 계산해야 한다.
설정 과정에는 소유자의 협력과 등록면허세, 지방교육세, 등기 수수료 등이 따른다. 법무사에게 맡기면 보수도 추가된다. 부담 주체를 계약 전에 정하고, 등기신청에 필요한 서류와 전세금·목적물 표시가 계약 내용과 맞는지도 확인하는 편이 좋다. 비용을 들였는데 등기가 늦어져 그 사이 다른 권리가 먼저 들어오면 기대했던 순위가 달라진다.
만기가 왔는데 보증금을 받지 못했다면 말소서류부터 건네는 일도 조심해야 한다. 민법 제317조는 전세권이 소멸할 때 목적물 인도와 말소등기에 필요한 서류 교부, 전세금 반환을 동시에 이행하도록 정한다. 실무에서는 반환 일정과 실제 입금 확인을 맞춰 움직인다. 경매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도 낙찰가가 낮으면 전액 회수는 어려울 수 있다.
저는 전세권설정이 보이면 먼저 ‘언제 등기됐나’, 다음으로 ‘배당요구를 했나’, ‘같은 사람이 임차인으로서 어떤 권리를 갖췄나’를 적는다. 세입자에게도 낙찰자에게도 중요한 건 등기라는 이름 자체보다 그 집에서 실제로 얼마를 회수하고 얼마를 떠안게 되는지다. 그 숫자가 또렷해지기 전에는 입찰표에 금액을 쓰지 않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