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약주의사항을 경매장에서 다시 배웠다

경매장에서 배당표를 보다 보면 집값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세입자의 보증금이 얼마 남았느냐는 겁니다. 계약할 때는 멀쩡해 보였던 집도 경매로 넘어오면 순서대로 돈을 나눠 받습니다. 전세계약주의사항을 묻는 분에게 제가 등기부와 다른 세입자 이야기부터 꺼내는 이유입니다.
집값 3억이라는 말만 믿으면 계산이 틀어진다
예를 들어 주변에서 3억 원쯤 한다는 집에 선순위 근저당권의 채권최고액이 1억 원, 내 전세보증금이 1억 7천만 원이라고 해봅시다. 둘을 더하면 2억 7천만 원입니다. 겉으로는 집값 안에 들어오죠. 그런데 경매에서 2억 4천만 원에 낙찰되면 계산이 달라집니다. 선순위 채권에 먼저 배당하고 세금이나 집행비용 같은 변수까지 따지면, 내 보증금을 전부 돌려받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채권최고액이 실제 대출 잔액과 같다는 뜻도 아니어서 서류 한 장으로 회수액을 단정하면 안 됩니다.
시세도 호가 하나로 잡지 않습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서 비슷한 면적과 층의 거래를 찾고, 거래가 뜸한 빌라라면 보수적으로 값을 잡습니다. 최근 거래 한 건이 유난히 높다면 그 가격에 내 집도 팔릴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경매 현장에서는 ‘얼마에 내놨다’보다 ‘실제로 얼마에 팔렸나’가 돈이 됩니다.
등기부가 깨끗해도 다가구는 한 번 더 묻는다
계약 전에는 등기사항전부증명서의 갑구와 을구를 같이 봅니다. 갑구에서는 소유자, 압류·가압류·가등기·신탁등기를, 을구에서는 근저당권과 설정 날짜를 확인합니다. 건축물대장으로 주소와 용도, 위반건축물 표시도 대조해야 합니다. 서류의 주소나 호수가 계약서와 다르면 대충 고쳐 적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특히 다가구주택은 다른 세입자의 보증금이 등기부에 모두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 건물에 여섯 가구가 살고 있다면 내 앞에 들어온 다섯 가구의 보증금이 얼마인지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임대인에게 선순위 임차인의 보증금과 계약 현황 자료를 요구하고, 확인이 어려우면 그 불확실성 자체를 위험으로 계산해야 합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도 다가구 계약에서는 다른 세입자의 선순위 보증금을 따로 확인하도록 안내합니다.
집주인의 국세·지방세 체납 여부도 확인할 항목입니다. 세금은 사안에 따라 배당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등기부에 빚이 안 보이니 괜찮다’는 말만 듣고 계약금을 보내기엔 보증금 액수가 너무 큽니다.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 사람과 돈의 길을 맞춘다
등기부상 소유자와 계약하는 사람이 같은지 신분증으로 대조합니다. 공동 소유라면 소유자 전원의 계약 참여 여부를 확인하고, 대리인이 나왔다면 위임장과 인감증명서, 대리인의 신분증까지 봅니다. 보증금은 계약서에 적힌 임대인 명의 계좌로 보내고 이체 내역을 남기는 게 기본입니다. 제삼자 계좌로 보내 달라는 요청은 이유와 권한이 명확하지 않다면 멈춰야 합니다.
특약은 말로 들은 약속을 문장으로 바꾸는 자리입니다. 예컨대 ‘잔금 지급 전 기존 근저당권을 말소한다’고 했다면 말소 시점과 확인 방법을 적어야 합니다. 잔금일에도 등기부를 다시 열어 실제로 말소됐는지 확인해야 하고요. 계약 뒤 새 근저당권을 설정하거나 소유권을 넘기지 않는다는 약속도 입주와 전입신고 뒤 권리가 생기는 시점까지 고려해 적습니다. 특약을 넣었다는 사실만으로 등기상 선순위 권리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전세대출이나 반환보증을 생각한다면 계약금을 보내기 전에 은행과 보증기관에 해당 집의 취급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계약서에는 대출이나 반환보증 심사가 불가능할 때 계약금 반환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구체적으로 협의해 적을 수 있습니다. 다만 특약 문구가 있어도 실제 분쟁에서는 이행을 다퉈야 할 수 있으니, 심사 가능성을 먼저 확인하는 순서가 편합니다.
잔금 보낸 날에도 계약은 끝나지 않는다
잔금일에는 등기부를 다시 확인하고, 실제로 집을 인도받은 뒤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챙깁니다. 현행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주택 인도와 주민등록을 마친 임차인의 대항력은 그 다음 날부터 생깁니다. 그 사이 권리 변동이 생길 수 있어 계약일에 봤던 등기부만 믿고 잔금을 보내면 곤란합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도 계약 직후와 입주 직후의 권리관계 재확인을 안내합니다.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은 이름만 듣고 자동 가입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주택가격, 선순위 채권, 건축물 상태 등 심사 조건이 있고 신청 기한도 있습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신규 계약 기준으로는 잔금지급일과 전입신고일 중 늦은 날부터 계약기간의 절반이 지나기 전에 신청해야 합니다. 가입 가능 여부를 미리 확인하고, 실제 보증서가 발급됐는지까지 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제가 경매장에서 본 아쉬운 사례들은 대개 대단한 법률 지식이 없어서 생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세를 넉넉하게 잡고, 다른 세입자의 보증금을 묻지 않고, 잔금일 등기부 확인을 미룬 작은 선택이 겹쳤습니다. 전세는 수익을 내는 투자가 아니어도 큰돈을 맡기는 거래입니다. 서류를 확인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 나오면, 저는 그 집보다 제 보증금을 먼저 생각합니다.
